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스 다윈 (문단 편집) == 학술 활동 == 1838년 지질학회 [[서기]]에 선출되었다. 1839년 1월 훌륭한 조수이자 외사촌인 에마 웨지우드(1808~1896)와 [[결혼]]한 후, 탐구 여행에 관한 보고서를 출판하는 등 활발한 학문활동을 했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웨지우드 도자기 회사를 운영하는 에마의 집안과 다윈의 집안 모두 부유했기 때문에, 다윈은 학자로서의 연구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1842년 생물계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 '''〈산호초의 구조와 분포〉'''를 발표했으며,같은 해에 종의 발생에 관해 착상했다. 1844년 '''〈화산도의 지질학적 관찰〉'''을 출판했고, 1846년 비글 함의 탐험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남미의 지질학적 관찰〉'''을 발표했다. [[파일:external/www.chicagoontheaisle.com/Watercolors-of-Emma-Darwin-and-Charles-Darwin-1840-by-George-Richmond.jpg]] (다윈 부부의 초상화. 왼쪽이 부인 에마 웨지우드) 이러한 활발한 학문활동은 다윈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닌, [[독일어]] 등 5개 [[언어]]에 능통한 에마의 번역 봉사를 받아서 이룬 것이기도 하다. 다윈은 흔히 진화론의 이론을 정리한 생물학자로만 알려져 있어서 당시 일부 보수 언론들은 다윈을 [[원숭이]]에 빗대는 풍자만화를 그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남아메리카 여행 당시 [[백인]]들의 [[흑인]][[노예]] 제도에 격분하여, 노예제도를 반대하기도 했다.[* 이는 할아버지인 이래즈머스 다윈의 영향이 컸었다. 일부에서는 처음부터 다윈이 인종차별과 노예제도에 반대하기 위해서 진화론을 창시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는 남아메리카 여행 당시 피츠로이 함장과 노예 제도 문제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함장이 노예들이 행복하냐는 질문에 대해 모두 그렇다고 대답한다고 하자, 다윈은 이에 대해서 만약 주인이 없는 곳에서도 그런 말을 하겠느냐고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백인 주인들이 노예들을 학대하는 노예제도를 싫어했으며 반대했다[* 다만, 이 일화를 두고 [[로버트 피츠로이]]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매도하는 건 잘못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도 항해 도중에 [[HMS 비글|비글 호]]에 승선해있던 [[티에라델푸에고]] 원주민 두 명을 고향으로 데려다준 일이 있었는데, 원주민들이 거의 헐벗은 몸에 거칠고 호전적인 경향을 보여주어서 다윈이 크게 실망하자, '야만인'을 군함에 태울 수 없다는 상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국]]의 발전한 문물을 가르쳐주려고 이들을 배에 태웠던 이야기를 해주면서 다윈을 달랜 일화가 있다. 당시에는 '[[백인의 의무|문명의 이기를 누리지 못한 이들을 근대화로 이끈다]]'는 주장이, 엄연한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비문명인'들을 백인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상이라고 평가받은 바 있었다. 비록 다윈의 이론을 곡해한 결과이긴 했으나, 아래의 [[허버트 스펜서]]가 [[사회진화론]]을 주창한 것도 이런 생각의 연장선이다. 그리고 피츠로이는 뒷날 [[뉴질랜드]]의 2대 총독으로 부임했을 당시에 [[백인]]들의 침략으로 인해 고통받던 [[마오리족]]들의 권리를 최대한 인정해주려고 한 바도 있다.]. 또한 자신의 생물학적 진화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사회진화론]]을 주창한 [[허버트 스펜서]]에[* 정확히 말하자면 다윈은 스펜서가 쓴 '진화'라는 용어만 가져다 썼을 뿐이다. 그나마도 원래는 꺼리던 용어였으나 유행하면서 억지로 쓴 것에 가깝고. 하지만 스펜서는 생물학적 진화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론에 이용했다. 생각보다 심하게 왜곡된 게 문제.] 대해 "그의 이론은 과학적 측면에서는 전혀 가치가 없다."며 신랄한 혹평을 가했다.[* 특히 다윈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에 악용된다는 점 때문에 그의 이론을 더더욱 싫어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윈이나 스펜서나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에 모두 반대하는 진보주의자였던 게 함정.] 앞의 이야기와는 꽤 모순되게 보이겠지만 아르헨티나에서 원주민들이 살해당하고 아이들이 노예로 잡혀가는 것을 보고 이 기독교 문명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니 놀라울 테지만 나는 이들(원주민)이 그런 대우를 받는 데 그다지 불평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The children of the Indians are saved, to be sold or given away as servants, or rather slaves as long a time as the owners can make them believe themselves slaves; but I believe in their treatment there is little to complain of".] 이는 인종 자체를 열등하게 본 것이 아니라, 원주민 사회의 환경이 다윈의 기준에서는 야만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B0%B0%EC%8A%A4_%EB%8B%A4%EC%9C%88|링크]][* 다만 영국인 특유의 블랙유머적 정서로 해석하면, 오히려 원주민들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뭣보다 다윈은 원주민들을 엄연히 '''문명인'''으로 인식한 사람이다.] 이 점이 와전되어 ''다윈은 원주민들이 원숭이처럼 진화가 덜 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수십 년 후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 문명 생활을 하는 것을 알고는 진화론을 주장한 것을 후회했다''는 낭설이 우리나라 개신교인 사이에서 퍼졌다. 하지만, 다윈은 원주민들이 뒤쳐저 있어서 비참한 상황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라 한 것이지, 이들이 문명화될 수 없다고 여긴 것은 아니다. 위 링크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인종보다는 문화적 이질성이 갈등의 원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자문화 중심주의라는 점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있지만, 사실 지금도, [[닫힌 사회|우리의 기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를 고집하는 지역]]에 대해 '''그들 사회 사람들은 차별받아도 싸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생각한다면, 다윈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다윈이 살았던 시대는 19세기다. 현대의 시각으로 다윈을 평가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른다. [[파일:종의기원초판.jpg|width=400]] 귀국 직후 [[종의 기원]]을 저술하기 시작했지만 세상에 미칠 파장을 염려, 더 확실한 증거를 모으기 위해 20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렸다. 이후, 훗날 다윈의 평생 친구이자 선의의 라이벌이 된 생물학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가 인도네시아에서 연구한 자료를 토대로 자신에게 보낸 논문과 편지에 담긴 학설이 진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자[* 흔히 다윈이 월리스의 편지를 보고 자신감을 가졌다고 하는데, 사실 월리스의 편지를 처음 본 다윈은 '''엄청나게 불안했었다.''' 아닌게 아니라 비글 함 항해로 각종 국가에 다니면서 여러 생물의 진화에 대해 연구했을 그가 한 젊은이한테 진화론 주장의 위협을 느끼는 거나 다름없었으니... 그러나 추후에는 종의 기원을 발표하였고 불안감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종의 기원을 출판하면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았다.] 다윈은 1858년 월리스와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하였고, 1859년이 되어서야 종의 기원을 출판하게 된다. 월리스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뺏겼다고 생각할 만도 하지만, 오히려 다윈과 논문을 공동으로 발표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표현했다. 이후로도 다윈과의 교류를 통해 다윈의 학설이 더 완성도 있고 설득력 있음을 인정하고 함께 진화론을 연구하는 동반자의 길을 걸었다.[* 다만 둘은 몇 가지 쟁점에 대해 의견을 크게 달리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진화에서 적응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문제다. 다윈은 어떤 기능을 가진 기관이 발달하면서 그 기능과 관련 없는 기관이 변화하거나, 한 기관이 그것이 발달하게 된 원래의 이유와 상관없는 기능을 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어떤 진화는 적응의 직접적인 결과가 아니라 일종의 '부산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월리스는 모든 진화는 적응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개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진화한 것이지, '부산물'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현대 진화론은 다윈의 견해에 훨씬 가까우며, 적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소위 '적응주의자'들조차도 월리스처럼 극단적인 주장은 하지 않는다. 또, 다윈은 인간의 정신도 진화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 월리스는 여기서 한 발 후퇴해 인간 정신의 발생에는 초자연적인 원인이 있었을 거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월리스는 늘그막에는 심령과학적인 면에 빠져들어서 심령학으로 병을 고친다는 사기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나 월리스 역시 동남아에서 여러 생물 연구 및 체계 조사 같은 면이나 다른 생물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친구인 곤충학자 [[헨리 베이츠]]와 남미 정글을 다녀보기도 했고,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다니고 생물을 채집하면서 관찰하기도 했다. 다만 남미에서 돌아올 때는 병에 걸리고 '''배에 불이 붙어 연구물들이 다 타버리는''' 등 수난이 많았다. 현재 말레이제도의 생물지리적으로 구분되는 중간 지점을 월리스 선(Wallace's line)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그의 동남아시아 항해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바로 오늘날의 [[말레이시아]] [[사라왁]] 주의 전신인 [[사라왁 왕국]]의 [[백인]] 왕 [[제임스 브룩]]이었다.][* 월리스는 말년에도 엄청난 업적을 남겼는데, [[명왕성]] 발견의 초석을 닦았던 [[미국]]의 [[천문학|천문학자]]인 [[퍼시벌 로웰]]이 [[화성]]에 운하가 있다는 주장을 펼치자, 곧장 이에 반박하는 이론을 발표했다. 월리스의 이론에 따르면, [[화성]]의 표면은 극도로 건조해서 액체 상태의 수분이 생겨도 운하를 이룰 정도로 크게 흐를 수준은 못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노익장|이때 월리스의 나이는 무려 82세였다]].''' 월리스의 예측은 뒷날 [[NASA]]에서 추진한 화성 탐사계획인 [[매리너 계획]]을 통해 사실로 밝혀졌다.] 이런 진화론에 대하여 영국은 물론 전유럽에서 찬반이 오고갔다. 하지만 진화론에 대하여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은 세계에서 여럿 있었으며 진화론이 나오자 공식적으로 지지하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다윈은 진화론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발표한 학자일 뿐 진화와 연관된 생각을 처음 해 본 학자는 당연히 아니다. 다윈 이전에도 학계에서는 종의 다양성과 변화에 대해 어느 정도 조심스럽게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진화론 비슷한 생각은 아득히 오래전부터 있었다. 우선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가 인류의 기원에 대해 본래 물고기같은 수생동물이었다가 땅으로 올라오면서 형태가 변화했으리라 추측한 사실이 익히 알려져있다. 이외에 호주 원주민의 전설에도 종 분화 비슷한 개념이 등장하고 다윈이 주장하기 천 년 전 아랍인 과학자도 생물의 오래전 뼈를 보면서 과연 알라가 생물을 창조할 때 그 모습 그대로 영원히 낼까? 사는 곳마다 다른데 뭔가 다르게 창조한 게 아닐까 아니면 창조한 것이 기후나 여러 지역에 맞게 조금씩 달라지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기록까지 남아있다.] 심지어 영국을 라이벌 삼던 프랑스에선 오랫동안 묻혀졌던 [[용불용설]]을 다시 발굴해내 이 주장을 한 라마르크의 유일한 혈육인 작은 딸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이것을 대대적으로 알리면서 우린 다윈보다 50년은 앞서 진화론 비슷한 주장을 한 이가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다윈에게 진화론에 대한 주장을 보이라는 초청이 많았으나 수줍음이 많고 많아 사람들이 나가는 자리를 꺼린 그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다윈이 진화론을 정립하면서 정신적 스트레스로 밖에 나가는 걸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신 [[진화론]]의 열광적인 지지자인 토머스 헉슬리(1825~1895)[* 다윈을 대신해 각종 논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멋진 신세계]]로 유명한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더불어 아들은 레너드도 작가로 이름을 알렸고 또 다른 손자인 제프리는 영국 교육부장관에 올랐으며 유네스코 초대 사무총장 줄리언 헉슬리나 196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앤드루 헉슬리도 손자다.]나 조지프 후커(1817~1911) 같은 후배들이 대신 나서서 이런 논쟁에서 격렬하게 맞섰다. 피츠로이 [[제독]]은 독실한 [[성공회]] 신도였는데, 그는 진화론에 대하여 비난했다. 그 뒤에 피츠로이는 1863년 해군 [[중장]]까지 진급했으나 이 당시 [[우울증]] 및 가정적인 문제로 시달리고 있었다가 1865년 4월 30일 아침, [[면도]]하는 자리에서 면도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자살 5년 전에 이미 정신이 이상해져 성서를 머리위로 치켜들고 방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성경을! 성경을!'이라고 고함을 질러댔다고도 한다. 이쯤 되면 다윈에 대하여 그는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진화론 문제 말고도 당시 그는 정치가로서 활동을 말아 먹어서 빚도 지고 여러 모로 실패한 경력으로 경제적 고민에 시달려 아내와 이혼했었다. 하지만 다윈이 피츠로이 제독을 싫어했던 건 아니다. 다윈은 자서전에서 피츠로이 제독을 이렇게 평했다. >그는 의무에 충실하고 실패에 관대하고, 용감하고, 의지가 강하고, 불굴의 정신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지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이 열성적인 친구였다 ... 큰 단점으로 욱하는 성질이 있었지만 그의 성격의 일부는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훌륭했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비록 [[우울증]] 증세의 일환으로 [[기독교]] [[근본주의|근본주의자]]가 된 것이 [[흑역사]]이긴 하나, 젊은 시절의 그는 엄연히 [[라이엘]]과 함께 [[지층]] 생성의 메커니즘을 규명하여 현대 [[지질학]]을 확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학자이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뒷날 그 자신이 적대하게 된 다윈처럼 피츠로이도 이때 당시에 종교계의 무수한 공격을 받았지만, 반대로 과학자들로부터는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이후 인간의 진화와 성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를 출간하여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종의 기원에서도 인간 역시 진화의 산물이라는 점이 암시되었고 성 선택에 대한 설명이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인간이 창조가 아닌 진화의 산물이라는 점이 명백하고도 상세하게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해부학자인 미바트 같은 사람들은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을 출판하는 것이 관습 뿐만 아니라 법에 저촉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